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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50.225.241) 조회 수 4836 댓글 3
얄궂은 일이었다. 보려니까 본 것일 수도 있겠다. 너무 피곤하니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쁜 내가 웬일로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그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내가 유난히 얼굴을 기억잘하는건지, 아니면 먼 예전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론 몇년 안된 일이라 그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이름석자도 같고, 학력도 확인하니 그가 틀림없다.


최강의 물리, 물리 논술
"XX대 물리교육과 졸"


왠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그" 라고 표현하니, 혹시나 뭔가 "애틋한" 마음이 있는듯한 느낌도 나는데, 나는 그에게는 애틋한 마음이 없다. 다만, 그 얼굴과 함께 떠오른 시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98학번인 나는 대학의 과도기를 경험했던 것 같다. 신세대, X세대로 불리웠던 94학번들도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선배들에게 "요즘 애들 다 저러냐"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내가 겪은 시기의 변화들이 왠지 더 커다란 변화인 것 같이 느꼈다. 98년도는 그 전년도에 대선이 있었던 해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IMF 시기가 시작된 해였던 것이다. 늘 단골처럼 드나들던 동네 서점이 문닫고, 연일 신문에서는 명퇴니 강퇴니 하는 말들이 전면을 가득 메웠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대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교직을 위한 사범대 커트라인이 솟구쳤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재학생들이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98학번인 내가 겪은 가장 큰 변화는, 대학 내 운동의 죽음이었다.

운동의 죽음.

그것은 곧 공동체의 소멸을 의미했다.  

학내의 공동체가 꼭 운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다양한 주제의 동아리들이 있어 그러한 동아리를 통한 공동체는 조금은 규모가 작아졌을지언정 여전했다. 하지만, 운동의 죽음은 곧 공동체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조금은 다른 뜻이다.

왜냐하면 이미 내가 들어간 98년도는 이념의 죽음 시대였기 때문이다. 문민정부와 함께, 타도해야할 군사독재정권은 사라졌고, 연대사태를 기점으로 더 이상의 굵직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던 당시 신문 사회면에는 데모가 없어지자 진압장비로 야구하는 전경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실리기도 했다. 어째서 그걸 기억하는가하면, 학교다닐 때 국어숙제로 신문 스크랩을 해오랬는데 워낙 그 사진이 인상깊어서 그걸 잘라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몇년 사이에 학내의 운동은 빠른 속도로 세를 잃어갔다. 물론 투쟁의 이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재개발지역 판자촌의 주민들도 있었고,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있었고, 하다못해 등록금 인상반대 투쟁도 있었고, 교내 높으신 분들 비리도 있었고, 김민수 교수 복직 투쟁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슈가 사라지는 마당에, 자본의 논리에 항거하자는 주장도 점차 설득력을 잃어갔다. "CEO"라는 말이 갑작스럽게 일상화되면서 관련 책들이 쏟아져나왔고, 점점 더 자본의 논리에 항거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으로 최고가 될 꿈을 꾸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운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1학년 가을에 과장 선거에 출마하여, 2학년에는 과대표를 지내고, 2학년 말에는 단대 선거에 출마하여 3학년에 단과대 회장을 지내고, 3학년 말에 총학생회장에 출마하여 4학년을 지나면서 총학생회장이자 한총련에서 활동하는 것은 정석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의 가장 큰 동력은 더이상 이념이 아니었고, 공동체였다.  

즉, 우리 과의 선배들이, 우리 과의 후배들에게 "함께" 하자고 했던 일들이고, "함께" 해야할 일들이었기 때문에 운동은 계속 이어졌고, 선거가 해마다 치루어질 수 있었다. 현장에 처음 나갈 때부터 자본의 모순과 20대 80의 논리를 알고 나가는 새내기는 없었을 것이다. 예전같으면 그 새내기들이 선배가 될 때 쯤엔 새내기 교사가 다시 될 정도로 "이데올로기화"가 가능했겠지만, 이념이 사라진 시대에는 "이데올로기" 보다는 "공동체"에 기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집회나 모임에 자연스럽게 참석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자본가 개새끼 먹지도 말라 하는 식의 운동권 노래 꽤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로 시작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모든 집회의 시작에서 불렸었고,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하는 후렴으로 끝나는 그 노래는 나름의 감동이 있었다. 나는 당시 PD 계열의 좌파 선본에서 단대 선거를 도왔다.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많은 일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새내기들은 선거 때 일종의 공연 비스무레한 "마임"을 하게 되는데, 몸치인 나는 밤을 새우며 연습을 해도 잘 안되어서 결국 그중 자신있는 "선전" 분과로 바꾸었던 것도 기억난다. 결국 선거는 졌다. NL계열이 당선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해의 선거는 꽤 장관이었다. 각기 선본대로 옷을 맞춰입은 사람들이 학교를 누볐고, 새내기들의 마임은 선본별로 특색있고 멋있었으며, 연설전도 뜨거웠고, 모든 것이 내겐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그 후 총학생회장에 최초로 비운동권인 사람이 당선되기도 했고, 그 다음 해의 선거에서는 규모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그 다음해엔 선거본부에 들어올 새내기가 없었고, 다음해엔가는 아예 선거에 출마할 사람이 없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엔, 어느 비오는 가을날, 페다에 사람 몇몇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고 앞에는 스피커가 나와있길래 어느 과에서 행사하나 싶어 물어보니, 단대 선거 유세라고 했다. 그 때 느꼈던 충격은 정말 말로 할 수가 없다. 운동이 끝났다. 이미, 이데올로기로서의 힘을 잃고 공동체에 기대어 있던 운동이 끝난 것이므로, 그것은 공동체의 죽음을 의미했다.

X세대가 준 충격은 자기 표현이 확실하고 옷 잘입고 너무 잘놀아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IMF 시기의 대학생들은 어떤 세대로 이름붙이기 힘들정도로 우리 사회를 강타해버린, 부지런히 자기 살길을 찾아 궁리해야만 하는 그러한 모습들, 그래서 그것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과감히 버려버리는 그런 모습들로 선배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누구였나면, 내가 그렇게도 열심히 대자보를 써대고, 아빠한테 여러번 전화해서 귀가시간을 늦추어가면서 정책자료집의 허드렛일을 도왔던 그 해 선거의 출마부후보였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선본의 사람들은 선본을 선택해서 운동을 했던 것이다. 사실은 선본을 선택했다기보다, 선배가 속한, 혹은 그 과가 속한 선본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우리 과가 전통적으로 PD에 속해있기도 했지만, 맘 속으로 NL보단 PD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더욱 일을 했다.  

"그"는 참 착해보이는 얼굴을 가진 선배였고, 특히나 약간 쳐진 눈이 약간은 강아지를 닮았다. 피부가 남자인데도 희고, 어딘가 모르게 약해보였는데 그런 자기 모습을 잘 알았던 듯 우리 선본 아이들이 일하고 있을 때는 더욱 우렁차게 인사하곤 했었다.

나는 정말 그 때 어렸고,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했으며, 우리 선본이 당선되길 바랬고, 그런 마음에서 후보들이 피곤하질 않기를 바랬고, 집에서 무슨 포도즙같은 것도 가져다가 후보님들 드시라고 권했던 기억도 난다.

선거가 끝난 후, 선본은 해체되었고, 그 다음 해엔 선본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새롭게 출마하기도 했지만, 나 역시 3학년이 지나면서는 집회에 점점 뜸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학원강사가 되었다. 학원강사가 나쁜 직업은 아니다. 절대로. 공교육부실화의 악순환 가운데 하나의 축이기도 한 학원이지만, 개인적으로 놓고보자면, 역시나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직업이다. 돈을 많이 버는 강사도 있고, 잘 벌지 못하는 강사도 있지만, 어느쪽이나 보람이 있는 직업이기도 하다. 또한 공부하다가 지쳐 혹은 생계를 위해 강사가 되었을 수도 있고..

그래도, 너무 생뚱맞지 않은가.

그러나..  나 역시, 대학원 다니면서 학원강사 해서 살림 꾸린다. 학비대고, 사람구실하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하니까. 학원, 사교육, 교육의 형평 문제는 생각하면 마음만 아프니, 일단은 제쳐둔 상태다. 이런 내가, 대형학원의 강사가 되어버린 "그"를 마주하는 느낌은 굉장히 애틋하다. 너무나 애틋하다. 잃어버린 시절에 대해, 그리고 나의 꿈이 점점 멀어지는 것에 대해.

이렇게 우린 "자본의 논리"에 너무 제대로 순응해버렸다.

그 때 정후보는 뭐하냐고. 우리과 선배다. 임용고시 보고, 참한 선생님이 되어, 바람직한 신랑감과 지난주에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결혼했다.

내가 묘사한 당시의 분위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지금도 학내에서 혹은 현장에서 아직도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분들도 계실거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운동의 시대는 끝났다.

안타깝지만, 외면할 일이라, 더욱 슬픈 하루다.





  
Comment '3'
  • 소공녀 2005.11.15 05:57 (*.54.63.6)
    맞아요.. 저는 96학번인데 그때까진 참 활발했었죠.. 저도 대학원 시험치고 지금 강사자리 알아보고 있는데 사는게 그리 쉽지는 않군요.. 발 펴고 누울 단칸방 하나에 만족하고 살기엔 말이죠....ㅎㅎ
  • 소공녀 2005.11.15 05:59 (*.54.63.6)
    참.. 으니님 의외로 젊으십니다..;; 글 디게 잘쓰시고 생각도 깊으시고 그러길래 전 저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현직작가님이 아닐까 생각했었어요...(늘 저에게 발생하는 치명적 오류군요.. 쉽게 단정지어 버리는..)
  • 무명기협 2005.11.17 11:14 (*.248.131.123)
    저도 96학번 인데....저희학교는 저런거랑은 많이관계가없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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