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나를 살리고 가족들을 살리는 살림

by 으니 posted Sep 1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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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한테 숙제를 내주고 공부를 마무리하려 하는데, 타다다닥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히 주방이 살짝 보이는 복도 비스무레 한 것을 지나쳐 현관까지 나가는데, 주방쪽에서 그 애의 엄마가 선생님 잠깐만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몇달만에 처음으로 그 집의 공부방이 아닌 곳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무슨무슨 팰리스라는 이름에 맞게 화려하게 꾸며진 주방이었다. 검은 대리석으로 덮인 조리대와, 여러가지 기기들, 화려한 식탁과 군데군데 아름다운 조명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양파를 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을 하러 가거나, 양손 한가득 쇼핑백을 들고 들어오기나 하던 그녀가 양파를 썰고 있었다. 평소에 일하는 아줌마도 있었는데, 아까 그 칼질 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였던 것이었다.

어지간히 잘꾸며진 집에선 놀라지도 않는 나는, 또 그렇다고 부자들에게 적개심 따위는 더더욱 없는 나는, 그냥 누구나 자기 능력껏 나쁜 짓 하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 살면 좋다.. 고 데면데면히 여기던 나는. 그 집에서 다른 어떤 걸 보고 놀란 게 아니라, 그녀의 양파써는 모습에 놀란거다. 그런 집에서도 여자가 결국 살림을 하는구나 라든가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살림은,

숙명.

제 아무리 돈많다 해도 요리는 해먹는구나 라든가 아무리 날고기는 여자라도 결국 밥도 하고 그러는구나 하는게 아니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엄마, 혹은 아내라는 이름의 여자에게서 가족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살림하는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

주방이 화려하든, ㅡ 자형 좁은 주방이든, 주방이라고 말하기도 못내 민망한 지경의 가스렌지 달랑 하나이든간에,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피로하고 반복되는 일일지라도 꽤 기쁜 것이다.

나도 내가 다른 일을 하지 않았던 한동안 주방에서 음식을 한 적이 있다. 서랍을 열어 칼을 꺼내고, 도마를 놓고 처음하는거 치고는 잘한다 생각하며 어설픈 칼질도 하고, 양파를 썰고, 당근을 작게 깎아 다듬고, 그 동안에 뭔가를 끓이고 삶고, 또 다 되어서 소쿠리에 넣어 찬물에 헹구고, 부지런히 냉장고에 뭔가를 넣었다가 빼었다가 하고.. 그렇게 음식을 한 적이 있다. 그냥 한 두번 한게 아니라, 매 끼 그리 하고 또 설겆이도 죄다 하곤했다. 아니 음식만 한게 아니라, 빨래도 돌리고 널고 말려서 개고, 다림질을 하고, 청소도 하고.. 꼭 엄마처럼 아내처럼 그렇게.

그건 엄청나게 행복한 일이다. 내가 가족을 위해서,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굉장히 본질적인 일이고, 그것이 없어서는 안되는 일이고, 해도 티는 안나고 안하면 금새 티나는 일이다. 그래서, 피로하고 귀찮기도 하지만, 정말로 행복한 일이고, 기쁜 일인 것이다.

나는 와아 정말 잘해놓고 사는구나. 라든가 혹은 이야, 요리도 잘하고 집안도 예쁘게 꾸몄구나. 하는 말보다,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살림을 하고 싶다. 밤중에 깨어 일어나 부엌에 와 냉장고를 열었을 때 시원한 냉수와 바나나 우유 하나쯤은 꼭 있는, 집안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아주 번쩍 번쩍 광을내어 닦은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것을 느낄 수 없는 그런 편안한 살림. 바깥에서 시달리던 가족들이 집에 왔을 때, 여기서만큼은 정말 두 다리 뻗고 누울 수 있구나 하는 그런 집을 만들고 싶다.

십년쯤 후에, 마사스튜어트를 능가하는 살림에 관한 책을 쓸지도 모른다. 제목은 "모두가 편안한 우리살림" 살림을 하는 안주인도 편하고, 도와주는 신랑도 편하고, 아이들도 편하고, 그 집에 살고 있는 가족들 모두가 편안한 살림. 적게 노력하고도 좋은 효과를 내는 살림법이라든가, 적절히 인스턴트를 이용하는 법, 빠른 시간안에 장보는 법, 좀더 오래 가는 청소법 같은 것들. 그리고, 가족끼리 더욱 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 같은것들.

웅.

드디어, 나, 가을타기 시작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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