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임병호 시인을 기리며

by 1000식 posted Apr 0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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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Qmuse Club 홈페이지에 실었던 저의 글입니다.

작곡 : G. Mahler
곡명 : Das Trinklied von Jammer der Erde(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노래)
연주 : Julius Patzak(T), Bruno Walter(Cond), Vienna Phil.



오늘 안동의 기인 임병호 시인이 타계했습니다.
임병호 시인은 약관의 나이에 시동인지 <글밭>을 만들어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안동의 시문학계를 이끌었고, 1996년부터 지금까지 8년동안 "시를 읽자 미래를 읽자"라는 소시집을 매월 발간하여 안동의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부하는 시읽기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임병호 시인은 1970년대 말 부산의 사상공단에서 직접 노동자로 근무하시면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은 처녀시집 "사상공단-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을 발표하였는데 통상의 노동시가 갖기 쉬운 선동성을 뛰어난 서정성으로 극복한 작품으로 저는 이 시집을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통상 노동시는 선동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서정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이미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만큼 성숙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지난 해 가을에는 안동포(삼베)의 본고장인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 있는 시서원에서 "가을시 콘서트"를 열었는데 귀래, 주근, 두환 형님께서도 참석하셨지요. 5월 중순에 저와 같이 동해안 일주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가시고 말았네요. 일주일에 2번 정도는 저희 시간여행에 오시곤 했는데 이젠 더 이상 뵐수 없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임병호 시인은 안동이 객지인 저를 무척 좋아라 하셔서 제가 운영하는 카페의 상호인 <시간여행>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주시기도 하셨죠. 이 시가 이 시인의 마지막 시(절명시)가 될 줄을 어찌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임병호 시인의 대표적인 시인 <명정(酩酊)>에다 말러의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노래>를 실어 영정에 바칩니다. "어이~ 정선생! 차 말고 술이나 한 잔 줘"라는 고인의 말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래는 제가 작년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임 병호 시인은 198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하여 1990년에 처녀시집 "사상공단 -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를 출판하였는데 이는 젊은 시절(1970년대 말)에 부산의 사상공단에서 3년 가량 노동자로 일하면서 쓴 시입니다. 공단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자, 서민들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노래하고 있지만 이 시대의 운동가들에게 빠지기 쉬운 선동이나 독단을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해를 통하여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시집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를 출판하였습니다.

임 병호 시인에게 가장 반가운 선물은 바로 "술"일 것입니다. 본인과 수차례 대작을 하였는데 안주없이 마시는 속칭 "깡술" 스타일이어서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았습니다. 평소의 좀 어눌한 말투가 술이 몇 잔 돌고나면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을 뿐더러, 주독이 몸 구석 구석에 배어 몇 잔의 소주에 그렇지 않아도 작은 체구가 흐느적거릴 때면 "술"이란 이 시인에게 있어 과연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취기어린 얼굴에 웃음이 떠오를 때면 마치 어린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눈빛을 보게됩니다. 이 눈빛에서 이 시인이 참으로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느끼게 됩니다. 이 시인의 시에는 "술"이 자주 등장하는데 시제(詩題) 중 "명정(酩酊)"이란 것이 있어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더니, 왈, 술이 곤드레가 되어 인사불성이 된 상태를 말하는데 이 때에 인간의 본성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수주 변 영로 선생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을 인용해가면서... 오늘 낮에 임 병호 시인이 저희 카페로 찾아와서 "선생님 뭘 드릴까요?" 물으니 대뜸 "어이! 정선생! 차말고 술이나 한잔 줘!" 하신다.

                       명정(酩酊)

                                                    임 병호

한 닷세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바퀴 돌아올 수 있는 땅을
한 번 찾아가 보았으면 좋겠다
엉긴 피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던지고
생채기 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외딴집 찌든 처마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서말쯤 막걸리라도 들여놓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앉아
구름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술잔이나 건네다가
三日長醉의 酩酊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들꽃이 두 눈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소나기 퍼붇듯 차창을 때리고
흰 눈이 살같이 흐르는
그런 時速쯤으로
광활한 대륙을 돌아들면 좋겠다
모두들 제 삶의 모습으로
쓰러지고 엎어져 꿈속에나 빠져 헤맬 때
툭툭 몸털고 몇번 눈이나 부비며
한 닷새 큰 수리처럼 머물렀던
기차를 배웅할 수 있는 큰 땅이
내 사는곳에 있었으면 참 좋겠다.

말러의 "대지의 노래" 중 첫곡인 "대지의 슬픔에 대한 술노래"를 골랐습니다. "대지"는 "현실세계" 쯤으로 이해하시면 큰 무리가 없을것 같네요. 말러는 현대사회의 불안과 소외, 그리고 부조리함을 일찌기 직감하고 이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작곡가인데 작곡 당시보다 지금에 와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시작된 말러의 열풍은 아직도 식을 줄을 모르고 뜨겁기만 하네요. 이 시의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골라서 나름대로 붙여봤는데 잘 어울릴지 모르겠네요. 이 연주는 음반 매니아들 사이에서 꿈속에서도 갖고 싶어 침을 흘리는 말러의 애제자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LP(초판, 1952년 모노녹음)음반에서 픽업했습니다. 임 병호 시인이 이 음악을 들으면 "그래! 바로 나를 위한 노래야!"라고 하실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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