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보아하니 당신은 딱 고등학생이군요, 맞죠?

by 으니 posted Sep 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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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한 후 어떤 페이지로 이동을 하려니까 로그인을 해야지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귀찮아도 회원가입을 해보자는 생각에 주민번호를 입력했더니 이미 가입한 주민번호라구 한다. 어찌어찌해서 아이디를 보여주는데, 아이디를 보니 내 아이디가 맞긴 맞는데, 비밀번호 찾기 탭을 누르니 이런 박스가 나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강남, 삼성, 인천 이런식의 지명일까 아니면 구청, 터미널, 공항, 백화점 이런 장소를 적어넣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음식점 이름이나 까페 이름 혹은 "상호가 기억나지 않는 종로의 어느 파전집"과 같이 황당하고 긴 대답일까. 경주, 병산서원, 운주사.. 내가 여행갔던 곳인가..

그러고보니 본인 확인 질문중에 확실한 것들이 있긴 하다. 아버지 성함은? 어머니 생일은? 태어난 곳의 동명은? 졸업한 초등학교는? 과 같은 것들.. 그런데 이런것들은 언제든 늘 고정되어 있어 편하기는 하지만 정확한 의미에서의 본인 확인 질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본인이 아니어도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의 이름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가장 의미있는 날짜는? 다시태어난다면 갖고싶은 직업은?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본인확인"질문인 것이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색깔, 사람, 노래와 같은 것 또 의미있는 날짜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알아서 내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거의 나와는 비밀이 없는 사람일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라든가, 가장 의미있는 날짜와 같은 것이 변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늘 과거에 시선을 던졌고, 그래서 난 진부하다고 느꼈고, 막연하게만 낙관적인 미래는 아주 먼 곳에 있었는데..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해왔는데, 드디어 잊어"버리는" 것들이 생겨났다. 슬픈 것은 잊어버렸다는 사실 조차 느끼지 못하는 완벽한 망각이라는 것이다.

Too Much Love Will Kill You* 사랑을 하게되면, 그것도 아주 많이 하게 되면 사람이 거의 죽을것만같이 된다. 그리고 죽을것만 같이 된 그 상태를 알기 때문에 다시 죽을것만 같아진다. 이전에 누구도 당신을 사랑한적이 없는 것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라고 빌리 할러데이는 노래했지만, 그것이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를 포맷하면 안될까. 그가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를 지워버리면 안될까. 그가 좋아하는 그 노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그것을 다른 누구와 공유했을까. 그가 날 데리고 간 그 까페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점점 더 생각은 유치한 쪽으로 치닿고 추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뿌리내리며 불똥은 황당한 곳으로 튀게 마련이다.

이건 물론 몇년째 같은 생각이다. 물론 내가 늘 주문처럼 외우던 교과서 같은 해결방법이 있다. 그 사람을 믿고, 또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매력적인 면뿐만 아니라 힘겨운 면들과 현재의 모습 뿐만 아니라 지나온 모습 그리고 그가 알고지낸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서 그의 기억들도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준 것이니까. 그리고는 앞으로는 우리가 해나가는 거니까.

그러나 결코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아마 결혼을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서도 호호할머니가 되어서도 사랑하는 신랑에게는 요런 감정을 분명코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젠에 누구도 쿨럭 에헴 당신을 쿠울럭 사랑한적이 없는 것처럼 에구 다리야 당신을 사랑하겠.. 쿨럭. 내가 이래서 서로 첫사랑이랑 결혼하길 바랬던거잖아 --;; 라고 투덜투덜대지만, 고딩영계를 만나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제나 과거에 묶여있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낙관적인 미래만 있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 내게는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는 그의 현재와 나의 현재가 만나 "지금"이 소중하고 그래서 "지금 이후"가 또한 소중해지는 것이었으면 한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없고 서로에게 오롯이 속할 수 있는.

나는 결국 그 웹페이지를 보기를 포기하고만다. 그러나 집착이 강한 성격이라 며칠내로 다시 몇통의 전화, 신분증 따위를 복사한 팩스 등을 이용해서 새로이 회원가입을 할지도 모른다. 본인확인질문이란 빈칸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써넣고는, 제발 앞으로는 잊혀지거나 흐려지는 일 없이 혹은 변해버리는 일 없이 죽을 때까지 늘 서슴지 않고 이 답을 써 넣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 그룹 퀸. Yes, too much love will kill you And you won't understand why You'd give your life, you'd sell your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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