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 그 눈에 미친 하얀 세상에

by 으니 posted Jan 1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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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첫눈도 더디오더니 그 이후로도 눈다운 눈이 오질 않아 은근히 기다렸는데, 지금 창 밖에는 굵은 눈송이가 날린다. 내리는 듯 떠오르는 듯 송이송이를 보니 마음이 벅차온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 그 해에 대한 기억들..

88년 아니면 89년이었을 것이다. 한강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꼭 해보고싶었던 "눈 위에 누워보기"를 했다. 엄마 아빠도 눈싸움에 휘말려서 옷버린다고 말릴 겨를도 없었다. 어쩌면 알고도 안 말렸던 것인지도.. 눈은 생각만큼 포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차가웁지도 않았다. 귀가 눈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고.. 눈밭과 이어진 하얀 하늘.. 그 때나는 결심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더라도 눈을 싫어할리는 없을 거라고.

몇해 전 겨울도 눈이 참 많이 왔었는데 그 때는 내가 바보같아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몰라서, 눈이 그렇게 펄펄 내려주었는데도, 눈밭에서 마음껏 뒹굴고 달리다 미끄러지고 넘어지지도 않고 그 해를 그냥 그렇게 보냈다. 참 바보같은 일. 다시는 오지 않을 현재의 소중함, 말로만 늘 이야기했지 그 땐 몰랐던 것이다. 가족들이 내 곁에 오래도록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지금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듯이 당시에 소중한 것들도 보석같은 날들을 위해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고 아꼈어야 했는데.. 그걸 몰랐다. 바보같은 일.

오늘도 눈이 온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오늘은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 사람은 누구였더라 다시는 예전을 펼쳐볼 수 없는 길고 긴 이야기 책, 변형된 주제의 첫부분을 되돌아가 들어볼 수 없는 미완성의 교향곡, 얼룩을 희게 되돌릴 수 없어 자꾸만 덧칠하게 되는 그림.

지금은 다시, 알면서 나를 속인다. 오늘이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롯이 모든 것을 던져야할 그 단 하나의 가치가 열쇠를 잃어버린 일기장 속에 갇힌 것처럼 생각나지 않아, 나의 오늘은 그 때와 꼭 같아 그냥 이렇게 눈을 온 몸으로 맞지 않고 창 밖으로 넘겨다 볼뿐이다.

미쳐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이제는 미칠 수 없어,
두려워진다.


어른이 되더라도 눈을 싫어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지금 몇달간 내가 은근히 눈을 기다려왔던 것은 모두 기만이었던가, 이렇게 그저 있을 뿐이니.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싫어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니까.. 역시 나는 날 속인 것이 분명.. 해.. 그리움은 나에 대한 그리움이다.. 나에 대한 그리움. 거추장스러운 내가 나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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