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길을 따라서

by 솔개 posted Mar 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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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숲의 노래, 무심한 햇살

   고창의 선운사. 절간 옆 동백숲에 한참을 앉아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이윽고 대웅전에 들러 샘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셨다. 대웅전 옆에는 그 유명한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이 붙어있었다.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 했다.
   2.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했다.  
   3.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했다.  
   4. 수행하는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했다.
   5.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겁을 꺾어서 일을 성취하라' 했다.
   6.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서 사귐을 길게 하라' 했다.  
   7.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 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 했다.
   8.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했다.
   9.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 했다.
   10.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했다.

   이 나라 불교는 다 좋은데, 아직도 너무 한 쪽에만 치우쳐 있는 것 같다. 일찌기 보조국사 지눌이 외쳤던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기치는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듯. 깨달았으면 사회적 실천에 몸을 던져야지, 어찌 그렇게 목탁 속에만 갇혀 있는가. 번뇌가 곧 보리라는 걸 알았다면. 그래,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내 길만도 천리다.
   아무튼 몇 군데 더 둘러보고 경내의 찻집에서 우전 한 잔. 아직 쌀쌀한 날씨 탓인지 휴일 관광객들의 표정이 조금은 움츠려 있었다. 몇 사람의 화객이 절간 옆을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 보이고. 그 찻집 창가에서 햇살을 쪼이며 오래도록 차향과 무심 속에 잠겨 있었다.

    선운사 동구(洞口)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선운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 여기 왔으니 막걸리 한잔 안 할 수 없다. 물론 詩 속의 막걸리집은 이미 자취도 없었지만. 산문에 즐비한 좌판집 한 곳에 등짐을 내려놓고 동동주 한 잔에 산천에 풀리는 이른 봄빛을 바라보았다. 동백숲 건너편의 맑은 시냇물은 물그림자를 키우며 흘러가고 그 기슭에 막 깨어난 버들개지들이 한참 봄물을 마셔대고 있었다.
   오후에는 근처의 개암사와 내소사에 들렀다. 절을 만나러 다니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곳 산천이 들려주는 얘기를 들으러 가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보수 공사가 한창인 개암사 승방 뒷편의 대숲가에서 햇살 받으며 한 줄에 천원짜리 김밥 2개를 누렁이와 나눠 먹었다. 내려오는 길에, 저수지 둑방 아래 어느 무덤가 잔디에 누워 잠시 먼 하늘을 안아보며 그곳 산천의 따뜻한 온기를 느껴보았다.

   미리 정해놓은 구체적인 행선지는 없으므로 내일이면 다시 어디쯤 흘러가 있을지 나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마음 동하는대로 흘러가 보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이번 여행의 목적은 텅 빔이요 무심(無心)이다.

    序詩
    -겨울나그네 1



    이즈러진 달빛, 한 줄기
    은비늘처럼 내리는 눈길 위에
    타고난 발자국 찍으며
    후회없이
    홀로 가는 사람.

    바람이 분다,
    옷깃 여미고 눈을 떠라.

    -2000.




마이산의 상사화나무

   선운사를 뒤로 하고 부안을 거쳐 다시 진안까지. 해는 어느덧 뉘엇뉘엇 너른 들판 사이로 떨어지고 시골 버스의 출렁거림에 몸을 맡긴 채 진안에 도착하니 밤 8시 무렵. 이미 읍거리는 어둠속에서 몇 개의 가로등만 눈을 꿈벅이고 있었다. 터미널 근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후미진 시골 여인숙에 여장을 풀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다음날, 오전 10시 쯤 정류소에 나와 마이산 탑사(塔寺)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마이산 근처를 거쳐가는 버스는 많았지만 직접 탑사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도 몇 대 없었다. 시골 아낙들과 노인네들이 정류소 밖 승강장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아 짧은 햇살을 쪼이며 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젊은이들이 별로 없는 소읍은 그렇게 조용하기만 했다. 멀리 바라보니 이곳 읍내에서도 마이산의 쫑긋한 당나귀 귀가 보였다.
   이윽고 탑사 아랫녘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탑사까지 2km 정도를 걸어올라갔다. 이른 봄의 탑사는 찾는 이도 드물었고 아직은 옷깃에 스미는 바람도 스산했다. 누렇게 금칠을 한 사찰(금당사)도 몇 개 보이고 올라갈수록 특이한 지질로 이루어진 그 돌산은 올려다 보기에 고개가 아플 정도로 급한 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상사화나무 하나가 마치 담쟁이덩굴처럼 돌산을 기어올라가며 자라난 모습이었다. 돌산에 막혀 가지를 마음껏 뻗지 못하고 마침내 돌벽을 타고 올라간 가지들이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게 명물인 돌산과 탑들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내려오니, 읍내 가는 버스는 무려 3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단다. 어찌할까 생각하다가 산 아래 마을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탑사 입구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들이 고인돌처럼 무리지어 있는 곳이 있었다. 살펴보니 이 곳이 구한말 이석용이 처음으로 의병창의를 발한 곳이라는 푯말과 함께 여러 사람의 이름이 석벽에 각인되어 있었다. 의병장 이석용(李錫庸, 1878~1914)은 전라도 임실 출신으로, 1907년 고종이 양위하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조직하고 진안 석전리에서 기병하였는데, 당시에 모여든 의병 수는 무려 5백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곳 석벽에는 당시 그렇게 의병에 참여한 대표적 지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후대에  이 일을 추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새긴 것이리라. 아무튼 이석용이 이끈 의병들은 그 후 약 2년에 걸쳐 진안에 주둔한 왜병들과 끈질기에 싸웠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왜병들의 신식무기에는 당할 수 없었다. 결국 1908년 4월 임실에서 크게 패한 뒤 그는 의병들을 해산시켰고, 순종에게 국가의 백년대계를 상소한 후 1912년 재기를 도모하였다가 체포되어 1914년 37세를 일기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 석벽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당시 의병들의 눈물겹고도 뜨거운 함성소리를 되새겨보았다. 그것은 아까 탑사 경내에서 보았던 그 상사화나무의 끈질김으로 살아있는, 그렇게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자유와 저항과 생명의 힘찬 불꽃으로 우리 가슴 속에서 타오를 것이다.

   다시 등짐을 지고 한 5리 정도를 내려왔을까, 이윽고 진안-무주간 국도가 나오고 작은 마을이 보였다. 버스는 거의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있었다. 간이 정류소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훑어본 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조용한 그 마을 어귀를 거닐어보았다. 잠시일망정 이렇게 철저히 홀로 있는 시간이 아늑하게 좋다. 논두렁의 누런 잡풀들 사이로 파릇한 싹들이 보이고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런 한적한 산동네에도 행상 트럭이 찾아와 두부며, 생선을 파는 듯했다. 불현듯 나타난 두부장수의 트럭에서는 마을의 정적을 깨는 염불(?)소리가 금새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고, 마을회관 앞마당에 몇몇이 나와 두부를 사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십여분을 더 기다려서야 버스가 왔다. 원래는 무주를 거쳐 충주로 가려고 했지만 무주 쪽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다음날, 증평과 금산을 거쳐 충주로 가는 고갯길. 진눈깨비가 치고 있었다. 음성을 눈 앞에 둔 '한금령' 고갯마루에 이르니 눈발이 조금 굵어졌다. 하지만 눈은 쌓이지 않고 이내 길가로 흩어지며 녹아들었다. 충주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미리 기별이 되어 있었던 한 지인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얼굴을 대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글을 통해서는 이미 몇 년이 넘었으니 그렇게 서먹한 만남은 아닌 셈이었다. 함께 승용차를 대동해 나와주신 그 친구분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충주댐 근처의 조용한 음식점에서 함께 조촐한 점심을 먹으면서 산행과, 詩와 또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잘 것 없는 이 몸에게 베풀어준 후의를 잊을 수 없다. 늘 건강하게 님의 길에서 평안하시기를.


부석사에서 맞이한 봄눈      

   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갈수록 산과 골이 깊어졌다. 그러고보니 이곳이 첩첩산으로 유명한 고장 '충북'이 아니던가. 충주댐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이윽고 단양에 도착하니 오후 3시 쯤. 단양은 전형적인 '산읍(山邑)'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도 묻어난다. 전국의 어떤 소읍도 이렇게 가파른 산악지형에 취락이 발달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아무튼 명승지로 유명한 단양팔경(丹陽八景)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가필이 필요없으리라.
   나야, 풍광이 수려한 그런 곳을 일부러 찾아 다녀본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지나는 길에 섰으니 '도담삼봉(島潭三峰)' 정도는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읍내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듯하고. 그러나, 물이 거의 말라버린 강물 위에는 삼봉이 떠 있는 것인지, 흐르다가 겨우 걸려있는 것인지. 분명 자연이 만들어 놓은 걸작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상쾌하질 않았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있을 때 좋은 것이다. 저렇게 상업적인 욕심으로 인공의 때를 덕지덕지 묻혀놓았으니 청심한 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퇴계 선생이 남겼다고 하는 詩 한수가 철지난 선거벽보처럼 정류장 안내판 옆에 걸려있었다.

    山明楓葉水明沙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三島斜陽帶晩霞 석양의 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爲泊仙橫翠壁 신선의 뗏목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待看星月湧金波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지더라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간간히 빗방울도 추적이고 있었다. 나는 괜히 기분마저 우충중해지는 듯하여 서둘러 읍내로 돌아와 영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영주는 소백산 아래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는 조용하고 아담한 도시다. 풍기의 인삼과 함께 영주의 사과는 당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작은 여인숙에 여장을 풀었다. 새로 지은 여인숙은 방은 작지만 깨끗하고 따끈따끈한 온돌방이 종일 한기에 쌓인 몸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양말과 속옷을 빨아 널어놓고 밖에 나와 저녁과 함께 술 한잔. 이곳의 전통술로는 '오정주'가 유명하다는데 일부러 맛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삼일절 아침. 간밤에 쌓인 눈이 지붕 위에서 희끗하다. 봄눈이다. 산간지역에는 대설주의보까지 내렸다는데, 예보와 같이 그렇게 많은 눈은 오지 않았다. 일찍 숙소를 나와 부석사로 가는 27번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는 좀처럼 오질 않았다. 그 정류장 가게 앞에 웅크리고 서서 바람을 피하고 있는데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와서 멈춰섰다.

   "어디 가시게요?"
   "부석사 가려고요."  
   "버스가 자주 없을텐데요..."
   "그래도 기다려 봐야지요. 언젠가는 오겠지요, 뭐."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뭐라고 중얼거리시더니, 택시 기사에게 행선지를 대며 묻는다.
   "저기, 안가나?"
   "거기 가는 동행(합승손님)이 없어서요... 어르신, 죄송합니다. 아, 글고 부석사는 제가 싸게 해드릴테니 한번 가시지요?"
   "얼마씩 하는데요?"
   "원래 편도 2만 5천원에 다니는데, 오늘은 손님도 별로 없고 갔다가 다시 오는 데까지 2만원에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원래 이런 여행을 할 땐 자꾸 편하고자 하면 안되지요. 돈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여행하는 맛의 일부 아니겠습니까? 그럴바에야 처음부터 승용차를 몰고 나서야겠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왕복 2만원이면 그리 비싼편은 아니라예. 버스비만 해도 4천 9백원 아닙니까? 그러니 그 정도는...원래 합승으로 잘 댕겼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휴일(삼일절)인데도 손님이 뜸하네요."

   문득, 그 젊은 기사의 인상을 보니 상술로써가 아니라 나름대로 진지한 자세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택시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 사람의 인상이 싫지 않아서라고 해야할까, 왠지 친근감이 들게 하는 젊은이였다. 부석사까지 가는 동안 그 젊은 기사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원래 이곳 영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는데, 그 후 객지를 떠돌다가 여러가지 일을 해봤지만 다 실패하고 몇년 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기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이런 곳에서는 농사 지을 땅이 없는 맨몸으로는 정말 살기 팍팍한 곳이라는 하소연도 늘어놓았다. 그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도 그런 떠돌이의 삶을 살아봤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서러움과 뼈저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밤새 내린 하얀 눈으로 들판과 봉우리들이 상쾌하다. 젊은 기사의 말로는 내가 운이 좋다고 한다. 이처럼 봄눈이 내린 부석사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여러번 부석사에 다녀보았지만, 겨울이 한참 지나서 이렇게 봄눈이 내린 부석사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 젊은이는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었다. 부석사로 가는 그 아침, 나는 문득 황동규 시인의 '삼남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



    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부석사까지는 거의 1시간 거리다. 가는 길의 들판엔 논밭보다는 인삼밭이 더 많은 듯했는데, 벙거지를 쓴 그 인삼밭들이 눈 속에서 마지막 겨울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풍기 땅이 많이 오염되면서 인삼밭도 이젠 영주 쪽으로 옮겨오는 추세라고 한다. 젊은 기사는 부석사 입구에서 차를 세우지 않고, 오른쪽 산중턱을 끼고 돌아 한참을 더 올라간 다음 절간이 바로 코앞에 보이는 작은 산동네에 나를 내려주었다. "천천히 둘러보고 느긋하게 내려오세요. 저는 저 아래 버스 승강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고보니 내가 내린 곳은 정식의 입산로가 아닌 듯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원래는 사찰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일주문이 있는 곳으로 올라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덕분에 곧바로 그 유명한 '무량수전'을 직접 바라보면서 경내로 들어갔다.

   신라시대 의상 스님이 창건한 고찰. 부석사는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 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로 너무 유명하다. 부석사의 건축미에 대해서는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라는 책이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에 너무도 잘 소개되어 있으므로 굳이 사족을 달지 않으련다.
   기실, 이렇게 봄눈의 정적에 싸인 산사는 그 같은 미학적 관심과는 상관없다. 꼭 무엇으로 유명해야만 가치가 있는 건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내가 있고 그것을 기꺼이 맞아주는 산천과 세월 속의 절간이 있지 않는가. 배흘림기둥이라는 건축양식이 어떻고 또 목조건물이 어떻고, 그런 세상의 잣대 따위는 잊어버리자. 그냥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뎌내면서 나를 기다려주었다는 느낌만으로도 족하다. 그렇게 한참을 무심 속에 머물며 그 정적의 언어를 음미한 뒤 산사 옆 작은 마을길로 걸음을 옮겼다. 간밤에 쌓인 눈들이 소나무 가지 위에서 소담스러웠다. 간간히 바람이 불어 그것들이 후둑거리며 멀리 흩어져가는 모습이 꼭 봄날의 낙화를 닮았다. 그 작은 마을의 소롯길을 지나 산문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과수원의 사과나무들이 굵은 허리를 틀어 기지개를 켜면서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내가 만난 부석사는 꿈 속의 말없는 여인이었다. 아마 그녀가 보내준 그 정갈한 미소는 오래도록 나를 잔잔한 그리움에 젖게 할 것이다.



*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동해안을 따라 내려온, 뒷얘기도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이 아침, 소록도가 보이는 내 고향 녹동항의 작은 인터넷방에서 몇 자  올렸습니다. 님들의 건승을 빕니다.

-詩人 박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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