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의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 - 병호 형을 생각하며

by 정천식 posted Aug 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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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잠든 깊은 밤.

 

여러 가지 상념에 잠 못 이루고 홀로 자작하고 있습니다.

 

오랜 만에 글을 한 편 올립니다.

 

 

&ltparam name="movie" value="//www.youtube.com/v/K0DFWb68ATU?hl=ko_KR&ampamp;version=3" /&gt

 

  

음악 듣기 : http://www.youtube.com/watch?v=K0DFWb68ATU 

 

 

 

 

 

519Fu4ZnywL.jpg

Bruno Walter conducts the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Wiener Philharmoniker), playing the 'Lied von der Erde' (Song of the Earth) by Gustav Mahler.
Tenor solo: Julius Patzak.

1st mouvement: Das Trinklied vom Jammer der Erde

Recorded May 14,15,16, 1952 

 

 

 

2002년 늦가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한창 떠들썩하던 월드컵의 열기가 잦아들 무렵, 안동대학교 학생회에서 왔다며 한 여학생이 『시간여행』(주1)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간여행』에 가끔씩 들러 차를 마시던 면식이 있는 학생이었다.

 

여기에 오면 임병호 시인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왔다고...

 

미선과 효순의 죽음을 기리는 촛불 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임병호 시인께 추모시를 부탁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안동의 시인들을 여럿 만나 봤는데 다들 부담스럽다고 기피한다는 것이었다.

 

 

 

방문 목적을 확인하고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 나였다.

 

병호 형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게 느닷없는 학생회 간부의 방문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서슬 퍼런 박정희 치하에서 병호 형의 자형이 『통혁당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친누님도 장기간의 옥고를 치렀다는 것을 『글밭』 동인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던 터였다.

 

병호 형의 가족사를 이 학생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학생의 맑은 눈빛 또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병호 형과의 만남은 곧바로 이어졌으며 병호 형은 이 여학생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영혼에 보내는 시

 

 

임병호

 

 

‘예수께서 저희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물으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경외로이 여기더라<마가복음 12:15-18>

 

 

우리에게 이 땅에서 다시는 부르지 못할 이름이 있으니

 

꿈 많던 우리들의 소중한 딸들

 

신효순과 심미선이라

 

무례와 역설 속에 참혹히 숨져 간

 

너희들은 혼백으로도

 

이 땅에서의 비극에 분노하라

 

나라와 국민과 여리디 여린 너희들까지

 

국토 분단의 제단에 제물화하는

 

이 땅의 모리배들을 경멸하라

 

나라의 정기와 어린 너희들마저

 

SOFA 불평등의 굴레 속에 내팽겨 책임질려 않는

 

이 땅의 위정자들을 저주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하게 하여

 

이 땅에 분별의 눈을 뜨게 하라

 

그 비겁함의 죄값을 다하게 하라

 

2002년 6월 13일

 

우리는 우리들의 살점 하나씩을 떼어 통곡으로 이 땅에 묻었느니

 

오늘 우리가 무엇으로 살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맑은 너희의 영혼에 보내는 우리들의 눈물과 아픔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길 굽어 살피라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용서하라. 고이 잠드시라.

 

 

 

 

월드컵 기간 중에 여중생 2명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진 이 사건은 월드컵이라는 축제에 가려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렸고, SOFA 협정에 따라 미8군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이 법정은 사고를 낸 미군 병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고, 요원의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병호 형은 현대사의 회오리 치는 광풍을 그 조그만 체구로 감내하신 분이다.

 

병호 형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고 대학을 그만 두고 이 땅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랑자처럼 떠돌았다.

 

대구 삼덕동의 『첫 입맞춤의 여인』(주2)과도, 『우슬재 너머 토말』(주3)에 살던 해남 처녀와도 맺어지지 못하고 평생을 총각으로 살았다.

 

1970년대 말, 서른 즈음에 병호 형은 흘러 흘러 부산의 사상공단으로 왔다.

 

당시엔 기업에 취업을 하려면 『신원조회』라는 게 있어 병호 형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단순작업을 하는 공원들에게는 이런 절차 없이도 취업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병호 형은 사상공단에서 공원으로 일하시면서 노동시를 쏟아냈는데 나는 이 시들을 무척 감동적으로 읽었다.

 

흔히 노동시가 갖기 쉬운 선동이나 처절함보다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시였다.

 

 

 

 

병호 형이 이렇게 노동시를 쏟아내고 있던 1970년대 말,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유신 독재의 끝자락에 우리는 다들 미쳐가고 있었다.

 

연애란 미친 짓이었다!

 

이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연애는 정말 미친 짓이었다.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한가하게 연애질이라니!

 

교내 지하 서클에서 활동하던 내게는 청춘남녀의 자연스런 연애조차도 죄스럽게 여겨졌다.

 

어릴 때부터 줄곧 가까이 해왔던 기타를 연주하는 일도 철없는 베짱이의 놀음처럼 느껴졌다.

 

병호 형처럼 내 젊은 시절도 이렇게 뒤틀린 모습으로 힘겹게 지나가고 있었다.

 

 

 

 

1979년 가을 무렵, 서울의 한 여자대학의 학생회장으로부터 부산 지역 대학의 학생회장 앞으로 면도칼이 배달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암울한 시대에 어찌 침묵하고 있냐고.... 사내 구실도 못할 바엔 차라리 잘라버리라고....'

 

이 사건이 『부마항쟁』의 한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이 시절 부산지역에서 대학을 보낸 사람이라면 웬만큼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유신 시대를 지나온 젊은이들이 느꼈던 절망과 분노와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느껴보았다면 어떻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지!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딸은 아버지의 잘못에 침묵한 자신은 공범자이며 평생 속죄하며 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쿠데타와 유신 독재를 두고 구국의 결단이었으며 그 유업을 이어가고 싶단다. 세상에나!
 
 
 
 

2013년 5월 1일, 임병호 시인 추모 문집 출판기념회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필자
 
 
 
 
 
세월은 덧없이 20여 년이 흘러 나는 안동에 둥지를 틀었고, 병호 형을 만났고, 『글밭』 동인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내가 운영하던 『시간여행』은 『글밭』 동인들의 아지트였다.
 
2003년 5월 1일 나는 병호 형의 부음(訃音)을 접하고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지휘한 말러(Gustav Mahler)의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를 골라 턴 테이블 위에 바늘을 올렸다.
 
1악장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 Das Trinklied vom Jammer der Erde』
 
직역하면 『대지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가 되겠지만, 모든 인간은 대지를 딛고 살아가므로 대지는 바로 현실세계(현세)가 된다.
 
술을 마시는 이유를 세상 모든 것(구름이든 천둥이든 아침이든 밤이든....)이 "자꾸 눈물이 나서"(주4)라고 하셨던 병호 형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을까!
 
더구나 마지막의 6악장 『고별 Der Abschied』은 세상과 마지막 이별을 하는 진혼곡이랄 수 있는 곡이니 이 땅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한 채 떠돌던 외로운 육신, 병호 형을 위무하는 곡으로 더없이 적합한 곡이다.
 
말러는 1악장을 이백(李白)의 『비가행 悲歌行』이라는 시의 독일어 번역시에 곡을 붙였다.
 
 
 
 
悲歌行
 
李白
 
悲來乎悲來乎 비래호 비래호
 
主人有酒且莫斟 주인유주차막침
 
廳我一曲悲來吟 청아일곡비래음
 
悲來不吟還不笑 비래불음환불소
 
天下無仁知我心 천하무인지아심
 
君有數斗酒 군유수두주
 
我有三尺琴 아유삼척금
 
琴鳴酒樂兩相得 금명주락양상득
 
一杯不千鈞金 일배불천균금
 
 
슬프고, 슬프도다!
 
주인장, 술이 있으니 이제 망설이지 말고
 
나의 한 곡조를 듣고 슬프거든 노래하시오
 
슬픈데 노래하지 않고 또 웃지도 않으니
 
천하에 내 마음을 알아줄 이 없구나
 
그대는 술을 드시게나
 
나는 거문고를 타겠네
 
거문고가 울리고 술은 기쁨을 주며 어울리니
 
한잔 술이 천만금보다 낫구나
 
 
 
悲來乎悲來乎 비래호 비래호
 
千雖長地雖久 천수장 지수구
 
金玉萬堂應不守 금옥만당응불수
 
富貴百年能畿何 부귀백년능기하
 
死生一度人皆有 사생일도인개유
 
孤猿坐啼墳上月 고원좌제분상월
 
且須一盡杯中酒 차수일진배중주
 
 
 
슬프고, 슬프도다!
 
하늘은 높고 땅은 끝이 없으나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도 세월은 기다리지 않네
 
부귀 백 년이 얼마나 갈까?
 
죽음과 삶은 모든 이가 겪어야 할 것을
 
외로운 원숭이는 앉아 울고 무덤 위엔 달빛 비치니
 
이 잔의 술을 한 번에 비우시게나
 
 
 
 
병호 형은 지금쯤 이백을 앞에 두고 권커니 잣거니하며 '『명정 酩酊』의 도(道)'(주5)에 대해 일갈(一喝)하며 군기를 잡고 계시지나 않을지…
 
"치와라 임마! 시는 무신 놈의 시고! 술이나 마시라 임마!"라고....
 
 
 
 
 
 
(주1) 필자가 운영하던 안동의 찻집
 
(주2~3) 임병호 시인의 "시간여행"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
 
(주4) 임병호 시인의 "문답 問答"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
 
(주5) "명정"은 임병호 시인의 대표적인 시로 술에 만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를 말하는데 임병호 시인에 의하면 이 때에 인간의 본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명정에 들어간다'라는 말은 술에 취해 신선이 되는 경지로 들어 감을 말한다.
 
 
 
 
 
<덧붙이는 글>
 
 
 
병이 사람을 가르칩니다.
 
술에 쩔어 부랑자처럼 살던 병호 형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동 법흥교 아래 강 바닥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이 일로 평생의 고질병을 얻었습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은 병호 형을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병호 형은 이 고통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으셨습니다.
 
 
 
                                                                   문답(問答)
 
 
                                                                                                                        임 병호
 
 
왜 그리 술을 마시는가
 
 
산이라든지
 
강이라든지
 
풀잎이라든지 꽃잎이라든지
 
 
구름이든
 
천둥이든
 
저 억수같은 비이든
 
 
아침이든
 
저녁이든
 
그믐 그 깜깜한 밤이든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
 
 
 
 
 
 
모차르트가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고, 슈베르트가 그랬습니다.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병호 형의 시가 그렇습니다.
 
말장난 같은 시가 횡행하는 요즈음.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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