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잠든 깊은 밤.
여러 가지 상념에 잠 못 이루고 홀로 자작하고 있습니다.
오랜 만에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음악 듣기 : http://www.youtube.com/watch?v=K0DFWb68ATU
Bruno Walter conducts the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Wiener Philharmoniker), playing the 'Lied von der Erde' (Song of the Earth) by Gustav Mahler.
Tenor solo: Julius Patzak.
1st mouvement: Das Trinklied vom Jammer der Erde
Recorded May 14,15,16, 1952
2002년 늦가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한창 떠들썩하던 월드컵의 열기가 잦아들 무렵, 안동대학교 학생회에서 왔다며 한 여학생이 『시간여행』(주1)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간여행』에 가끔씩 들러 차를 마시던 면식이 있는 학생이었다.
여기에 오면 임병호 시인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왔다고...
미선과 효순의 죽음을 기리는 촛불 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임병호 시인께 추모시를 부탁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안동의 시인들을 여럿 만나 봤는데 다들 부담스럽다고 기피한다는 것이었다.
방문 목적을 확인하고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 나였다.
병호 형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게 느닷없는 학생회 간부의 방문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서슬 퍼런 박정희 치하에서 병호 형의 자형이 『통혁당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친누님도 장기간의 옥고를 치렀다는 것을 『글밭』 동인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던 터였다.
병호 형의 가족사를 이 학생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학생의 맑은 눈빛 또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병호 형과의 만남은 곧바로 이어졌으며 병호 형은 이 여학생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영혼에 보내는 시
임병호
‘예수께서 저희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물으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경외로이 여기더라<마가복음 12:15-18>
우리에게 이 땅에서 다시는 부르지 못할 이름이 있으니
꿈 많던 우리들의 소중한 딸들
신효순과 심미선이라
무례와 역설 속에 참혹히 숨져 간
너희들은 혼백으로도
이 땅에서의 비극에 분노하라
나라와 국민과 여리디 여린 너희들까지
국토 분단의 제단에 제물화하는
이 땅의 모리배들을 경멸하라
나라의 정기와 어린 너희들마저
SOFA 불평등의 굴레 속에 내팽겨 책임질려 않는
이 땅의 위정자들을 저주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하게 하여
이 땅에 분별의 눈을 뜨게 하라
그 비겁함의 죄값을 다하게 하라
2002년 6월 13일
우리는 우리들의 살점 하나씩을 떼어 통곡으로 이 땅에 묻었느니
오늘 우리가 무엇으로 살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맑은 너희의 영혼에 보내는 우리들의 눈물과 아픔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길 굽어 살피라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용서하라. 고이 잠드시라.
월드컵 기간 중에 여중생 2명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진 이 사건은 월드컵이라는 축제에 가려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렸고, SOFA 협정에 따라 미8군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이 법정은 사고를 낸 미군 병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고, 요원의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병호 형은 현대사의 회오리 치는 광풍을 그 조그만 체구로 감내하신 분이다.
병호 형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고 대학을 그만 두고 이 땅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랑자처럼 떠돌았다.
대구 삼덕동의 『첫 입맞춤의 여인』(주2)과도, 『우슬재 너머 토말』(주3)에 살던 해남 처녀와도 맺어지지 못하고 평생을 총각으로 살았다.
1970년대 말, 서른 즈음에 병호 형은 흘러 흘러 부산의 사상공단으로 왔다.
당시엔 기업에 취업을 하려면 『신원조회』라는 게 있어 병호 형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단순작업을 하는 공원들에게는 이런 절차 없이도 취업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병호 형은 사상공단에서 공원으로 일하시면서 노동시를 쏟아냈는데 나는 이 시들을 무척 감동적으로 읽었다.
흔히 노동시가 갖기 쉬운 선동이나 처절함보다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시였다.
병호 형이 이렇게 노동시를 쏟아내고 있던 1970년대 말,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유신 독재의 끝자락에 우리는 다들 미쳐가고 있었다.
연애란 미친 짓이었다!
이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연애는 정말 미친 짓이었다.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한가하게 연애질이라니!
교내 지하 서클에서 활동하던 내게는 청춘남녀의 자연스런 연애조차도 죄스럽게 여겨졌다.
어릴 때부터 줄곧 가까이 해왔던 기타를 연주하는 일도 철없는 베짱이의 놀음처럼 느껴졌다.
병호 형처럼 내 젊은 시절도 이렇게 뒤틀린 모습으로 힘겹게 지나가고 있었다.
1979년 가을 무렵, 서울의 한 여자대학의 학생회장으로부터 부산 지역 대학의 학생회장 앞으로 면도칼이 배달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암울한 시대에 어찌 침묵하고 있냐고.... 사내 구실도 못할 바엔 차라리 잘라버리라고....'
이 사건이 『부마항쟁』의 한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이 시절 부산지역에서 대학을 보낸 사람이라면 웬만큼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유신 시대를 지나온 젊은이들이 느꼈던 절망과 분노와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느껴보았다면 어떻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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