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나이프를 이용해 긁고 덧바르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여 어두운 듯
예스런 중세 건축의 특징을 개성적으로 표현, 꿈인 듯 아련한 그리움의 정조를 자아낸다.
옛 성채와 고도(古都), 꿈과 꿈이 낮은 숨소리로 섞이던 골목길,
아득한 시공을 채우고, 거닐고, 호흡했을
이들의 밤과 꿈을 노스탤지어 연작에 담아온 이태향의 작품은 ‘이 작가는 나이프를 잘 사용한다.
그림을 그려놓고 깎아내는 그만의 기법으로 개성적 색감과 질감, 감성적 아우라를 연출하며,
특히 프러시안 블루의 배경과 황금색 교회 건물 같은 것은 매우 신성한 종교적 인상을 드높인다'
(미술사학자 홍진경)는 평을 들었다.
이번 이태향 초대전은 개인ㆍ그룹전을 통해 선보였던 초기 그림과 근작들로 구성,
어둠의 실타래를 풀어 빛의 베필을 짜는 작가 특유 영감을 풀어낸다.
우리는 드러난 역사만 대체로 기억한다. 행간의 역사는 숨죽인채 잊혀져 왔다.
이태향은 잊혀진 한국 예술사의 행간을 잇는다. 우리나라 근대 음악 선구자면서도,
일제와 건국전야를 관통하는 이념과 사상의 회오리, 소용돌이 속에 스러져 간
비운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의성(팔성)이 이태향의 조부다.
선구적 민간 예술교육기관인 경주예술학교를 설립해 음악과 미술을 가르친 이의성의 못다한 꿈이,
손녀 이태향의 손끝에서 양수겸장 맥을 잇는 셈이다.
관람시간 10시30분~18시, 월요일 휴관 (02)762-3322 www.galleryhogam.com
(참고자료)
경주 터줏대감 이의성(李義星, 1909.12.3~1976.2.25)
신라고도의 음악 터줏대감 이의성은 1909년 만석꾼 부자 이범인의 차남으로
경주면 서악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때 본명은 팔성이라 하였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 경주보통학교를 나와 서울로 진학하여 1927년
학창시절에 신차봉과 결혼하고 음악공부를 위하여 일본으로 유학하였습니다.
유학중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동맹의 산하조직 음악가동맹에 가입하여 이쪽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족음악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동경유학후 가정사정으로
체코행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였습니다.
바이얼리니스트로서 강점 일제치하의 질곡과 음악집념에의 무산으로 오랫동
안 좌절하다가 일심당 악기점을 운영하며 음악관련 활동을 펼치면서
그가 일찌기 꿈꾸던 ㅡ 풍부한 문화전통을 간직한 경주를 신문화예술도시로
발전시킬 ㅡ 꿈의 경주예술학원을 설립해 한반도에서 민간 예술종합학교를
선도한 음악인이었으며 이땅에 지방화와 세계화를 앞당긴 선구자로서 민족
문화 건설을 온몸으로 실행하다가 동생 이칠성의 월북으로 연고제와 분단체
제의 이념갈등으로 희생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53년부터 76년 대구에
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승의 좌절을 겪었습니다.
[출처] 우리 가곡음악사의 한 이면 |작성자 정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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