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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BACH21382009.04.03 01:13
음악과 권력 - 음악의 힘


이경분 (Lee Kyung-boon) :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독문학 석사, 음악 박사


언젠가부터 한국에서는 임산부와 태아를 위한 태교 음악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음악을 들으면 엄마 뱃속의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음악이 정서의 순화를 위해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어린이들에게 연주회에 가서 음악 감상문을 적어내는 숙제를 내 주기도 한다. 이처럼 음악이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여기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도 다윗이 음악으로 사울 왕의 우울함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만, 오늘날 음악치료는 인간의 마음을 고치는 약으로도 인기가 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음악은 아주 위험하다는 주장도 있다. 동화와 신화에는 음악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얘기가 많다. 동화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의 이야기에서 사나이가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쥐들을 강물에 모두 익사시켰지만, 나중에는 아이들을 유혹해서 모두 바위산으로 데리고 가 벼렸다. 피리부는 사나이가 이런 마력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피리소리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이 피리소리는 어떤 음악이었을까? 도대체 어떤 소리 였길래 어른들은 들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데, 쥐드로가 아이들만이 소리를 따라갔을까?

음악이 인간을 유혹하는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은 그리스 신화에도 있다. 그 유명한 예가 바로 사이렌 섬의 요정과 오디세우스에 관한 신화이다. 사이렌 섬을 지나가는 뱃사람은 누구나 사이렌 섬의 요정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되고 그 노래 소리에 넞ㅅ이 빠져 배가 좌초되고 만다는 얘기이다. 아무도 그 노래를 듣고 살아 남는 이가 없었지만, 오로지 오디세우스만이 자신의 몸을 꽁공 묶는 꾀를 내어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런 전설적인 이야기는 놀랍게도 먼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기술의 시대인 20세기에도 있다. 헐리우드 영화 <글루미 선데이>는 허구와 실제가 섞여 있는 영화인데, 1930년대 헝가리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당시 '슬픈 일요일'이라는 노래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자살충동을 느끼며 죽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노래와 자살하는 사람들과의 연관성이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모방자살이 유행처럼 번졌으므로 당시 헝가리에서는 이 노래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헝가리 밖에서는 세계적 히트곡이 되기도 했다.

노래가 이런 파괴적인 자살에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도대체가 가능한 것일까? 정말 음악 속에 자기 파괴적인 힘이 들어있는 것일까? 물론 '슬픈 일요일'노래 자체가 맨 마지막에 부를 수 밖에 없는 그런 노래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의 동화에서처럼 여기에서도 같은 노래를 들어도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음악에 반응하는 것일까? 또 어떤 심리적, 감정적 상황에서 사람들은 반응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에 대해 그리 아는 것이 많지 않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음악은 수 천개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이다. 매번 들을 때마다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경험했으리라 생각되는데, 같은 음악이라도 힘든 상황에서 들었을 때와 편안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들었을 때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음악의 효과는 맥락에 따라 매우 다를 수 있으며, 그래서 음악의 수용은 음악자체보다 음악 외적인 조건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노래 "슬픈 일요일"은 영화 <글루미 선데이> 덕분에 20세기 후반에 다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서 이 노래를 듣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의 유행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노래이지만, 이제 1930년대의 맥락과는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음악의 특성 때문에, 즉 맥락에 따라 여거라기 얼굴로 변신하는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에, 음악은 오히려 정치적인 맥락에 쉽게 끼워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파괴적인 권력의 힘이 음악의 도움으로 더욱 파괴적으로 증폭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비정치적인 음악이 매우 정치적인 수단으로 변신했던 독특한 예로 나치 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나치 제국의 권력자는 '독일은 음악적으로 뛰어난 민족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주장을 정치적 나치 프로파간다로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나치 선전부 장관이었던 요셉 괴벨스는 영리한 프로파간다 전문가였는데, 음악과 예술가들의 비정치적인 성향을 재빨리 파악하고 이를 잘 이용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정치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오히려 음악가들에게 직접적인 정치 음악이 아니라 고전음악을 연주하게 하는 전략을 썼다. 클래식 음악의 경우 프로파간다를 직접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그리 효과가 크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최고의 수준으로 연주하는 그것이 바로 수준 높은 프로파간다라고 여겼다. 따라서 오히려 음악가들에게 음악적 자유를 제공하고 통 크게 지원함으로써 이들을 정치적 맥락에다 끼워 맞추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특히 야심과 명예욕이 강한 음악가일 수록 괴벨스 전략에 쉽게 빠져들었다. 괴벨스가 쳐 놓은 거미줄이 걸린 먹이는 유명한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였다. 푸르트벵글러는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점차 독일 최고 악단인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나치 제국의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고, 특히 전쟁 중에는 괴벨스가 만든 맥락을 멋지게 완성해 주는 "음악적 외교관"이 되었다.

그 결과, 제 2차 전쟁초기에 이런말이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와서 연주하면, 그 다음에 그 나라는 독일 군대가 와서 점령한다고. 1940년 벨그라드에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당시의 말을 인용해보겠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1940년 5월 18일 처음으로 벨그라드에서 행사를 하였다. 이 오케스트라는 1939년 3월 15일 프라하에서 연주했고, 그리고 오슬로와 코펜하겐에서도 독일 침략이 있기 몇 일 전에 연주회 했던 바로 그 오케스트라이다. 118명의 독일 음악가들이 도착하면 곧 정치적, 군사적 공격이 뒤따른다는 끔직한 암시를 의미한다. 이들 악기의 감동적인 음악소리 뒤로 탱크와 군용트럭이 땅을 진동하며 구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은 그렇다고 전쟁을 미화하거나 히틀러를 직접 영웅시하여 찬양하지 않았다. 정반대였다. 오로지 지나간 세기의 음악가들인 베토벤과 모차르트, 바흐, 바그너 ,부르크너 등과 같이 늘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물론 멘델스존이나 말러와 같은 유대인 작곡가의 음악은 여주하지 않았던 것은 큰 예외였다. 음악가들은 항상 그래왔듯이 존경하는 대가들이 음악을 연주할 뿐이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멋지게 연주할 수록, 독일의 침략정책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치 음악가들이 배 위에서 멋진 연주를 하는 동안, 그래서 상대방이 넋이 빠져 음악을 듣는 동안, 이 배는 상대국을 행해 대포와 기관총을 쏠 준비를 완료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음악만 따로 보면 전혀 흠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당시 전쟁의 맥락에서 보면 음악은 나치정부의 살인과 폭력과 같은 끔직한 행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연막탄'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괴벨스는 프로파간다 정책에서 음악가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얘기한적이 있다.

"나치즘은 단순히 정치관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행위를 통째로 총괄하는 총체적 시각이다... 우리가 지휘자에게 이렇게 또는 저렇게 지휘하라고 일일이 지시하는 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무엇이 연주되고 무엇이 시대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결정한다."

이 말을 다르게 상상해보면, 마치 호화스러운 여객선 위의 예술가들은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배에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욕구대로 이용하면서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 배가 가는 방향이나 목적에 대해서는 어떤 발언권도 영향력도 없고, 이 배가 언제, 어디로 키를 돌려서 갈지에 대해서는 오로지 괴벨스의 손에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감성적으로 예민한 작가 토마스만은 나치제국에서 교묘하게 만들어내는 음악의 정치적 맥락을 그 누구보다도 재빨리 냄새 맡은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원래 히틀러처럼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였지만, 독일 마이로이트에서 공연되었던 바그너의 <신의 황혼> 음악극의 라디오 생중계를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치 독일에서 오는 "모든 것에 문화적 프로파간다 냄새가 난다" 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바그너 음악을 음악만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것이 먼 나라 독일과 독일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 한국인과도 관계가 있다. 일본 음악가로 활동하여 성공하려면, 어떻게 나치 제국의 문화 정치적 맥락에 자신을 끼워 맞추어야 하는지 잘 알았던 음악가는 바로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이다. 한국에서는 윤이상보다 더 잘 알려진 음악가로, 그가 작곡한 심포니적 판타지 <에텐라쿠>는 8세기 일본 궁정 음악의 선율을 차용해서 작업한 것인데,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냄새는 나지 않는 음악이지만, 독일과 일본의 전쟁 프로파간다에 잘 들어맞는 곡이었다. 일본 음악가 안익태의 지휘 하에 연주된 엑소틱한 <에텐라쿠>의 음향은 일본 정부의 '음악적 외교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즉 일본이 삼국동맹의 한 나라로서 독일의 편에서 서 있음을 암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문화 정책적 의도가 음악 자체보다 더 중요한 상황에서는 이런 맥락에 맞지 않는 음악과 음악가는 더욱 처참하고 불행한 처지에 내몰리게 되었다. 유대인의 음악, 재즈음악, 불협화음이 많은 현대음악은 나치제국에서 "퇴폐적"이다 또는 "문화적 볼셰비즘"이라고 금지되었다. 그런 예 중 하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한 기데온 클라인의 음악이다. 희생자들의 편에서 나왔던 음악은 오늘날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음악이 탄생한 맥락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희생자의 음악은 우리에게 오히려 관심을 요구하고 있고, 한번 깊이 생각해 볼 것을 청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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